어버이날을 앞두고 지난 주말에 모처럼 시골 고향을 찾았다. 세월의 파고 앞에 고향마을도 물질문명의 바람이 인 지 오래지만 그래도 고향은 언제나 푸근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고향을 찾고 나니 문득 어린 시절 부모님과 관련한 추억 한 토막이 생각나 몇 가지 단상들을 적어보려 한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여름날인가. 밭일을 하시는 아버님께 새참을 갖다 드리기 위해 집을 나선 어머님을 따라, 앞산 마당재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 '마당재'라는 곳은 경사가 60도도 넘는 험준한 산기슭에 자리한 곳이었다. 마당재로 향하는 좁다란 산길을 헤치고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쑥꾹~쑥꾹~" 깊은 숲속에서 한가로이 울고 있는 뻐꾹새는 물론이요, 놀란 눈망울로 나뭇가지를 오르내리는 눈이 맑은 다람쥐나 청설모를 민낯으로 만나기도 했다. 가끔씩은 서늘한 비늘을 앞세우고 꿈틀꿈틀 발밑을 지나가는 독사나 살모사같은 뱀을 만나기도 했다. 뱀을 만날 때면 어찌나 소름이 끼치던지 그때마다 어머님 치맛자락을 붙잡고 꼼짝달싹도 못한 채 제자리에 가만 서 있어야 했다. 그렇게 좁고 가파른 길을 따라 힘겹게 정상에 오르고 보면 아버님은 쏟아지는 땀방울을 연신 훔치며 밭일에 여념이 없으셨다.

아버님이 밭일을 하시던 '마당재'라는 곳은 걸어서 오르는 데만 무려 3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옥수수 수확철이 되면 아버님은 옥수수 가마를 지게에 지고 하루에도 대여섯 차례씩 왕복으로 이 길을 오르내리셨던 것이다. 맨손으로 걸어 올라가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까지 차기 마련인데, 옥수수가마를 등에 지고 그 길을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이나 오르내리셨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웬만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힘든 일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님은 낮동안에 그렇게 고단한 일을 하고 나서도 밤이면 다시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새끼를 꼬고, 먼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이른 새벽부터 소여물을 끓이셨다. 겨울철에는 농사일 대신 땔감나무까지 구하러 이 산 저 산을 다녀야 했으니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이라도 그냥 편히 앉아 쉬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농사일로 고생을 많이 해 지금도 아버님 손은 꺼칠꺼칠하고 투박하기만 하다. 비록 남들처럼 곱고 매끄러운 손은 아니지만, 남들이 꺼려하는 일도 마다 않고 내 가족을 위해 또는 내 이웃을 위해 누구보다 부지런히 땀을 흘리며 평생을 살아온, 누구에게 내놓아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아버님의 손.

중학교 때는 돈이 없어 남들이 입던 교복을 얻어 입으셨고 교과서도 살 수 없어 여기저기서 구걸하다시피 하며 학교를 다니셨다는 아버님. 그나마 학비를 내지 못해 하고 싶은 공부도 다 못하고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하시니….

동네에서도 남들 하기 싫은 궂은일까지도 솔선수범하시고, 우리 자식들에겐 콩 한 쪽도 나눠먹을 줄 알아야 형제이니, 형제간의 우애를 중히 할 것을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곤 하셨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자식들에게만은 농사일은 물려주지 않으려고 농사는 아예 배우지도 못하게 하셨던 아버님.

"세상은 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 때로는 남들이 하기 싫은 일도 먼저 해야 하는 게다."

"남들에게 손해본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결국은 잘살게 되는 거란다."

라는 말씀을 틈만 나면 누누이 우리 자식들에게 해주셨다. 그때는 잔소리로만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도 모르게 아버님이 해주셨던 말씀들이 자연스레 몸에 밴 것 같다. 지금은 내 자식들에게도 그 말씀의 의미에 대해 가끔 이야기를 해주고 있으니 아버님으로부터 값진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셈이다.

아버님이 지게로 곡식을 지어 나르시던 첩첩산중의 그 산길이 지금은 펜션단지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세상의 빠른 변화를 실감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가 싶다.

(칼럼위원 / 전성규 대한상공회의소 경기인력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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