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잎 굴러 바람에 흩날릴 때 생각나는 그 사람 오늘도 기다리네…. 낙엽이 지면 그리워지는 당신 만날 수가 없구나 낙엽은 지는데"

바삐 가던 길 멈추게 하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겠지. 그 중에서도 씻어낼 수 없는 그리움은 이 가을에 더욱 더 깊어만 가고.

이번 늦가을에는 또 다른 그리움이 아쉬움으로 남을까봐 다른 일정 다 팽개치고 평균연령 여든의 선배들과 가을소풍을 다녀왔다. 가장 멀리는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에서부터 가까이는 파주 탄현의 인조 장릉까지 해마다 두 번씩 다녀오는 동안 벌써 다섯 해가 흘렀다. 그동안 걸음걸이는 쌓여진 추억만큼 점점 느려지고 있지만 서로를 향한 연민(?)의 정은 깊어만 간다. 30년 넘게 차이가 나는 선후배가 가뭇가뭇하게 검버섯이 핀 낙엽 하나를 주워 들고 돌려가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향기를 맡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이제는 서로가 선긋기에서 벗어난 해맑은 미소 속의 동행인 것이다.

설렘을 준비물로 하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선 이번 길은 남양주에 있는 정순왕후의 사릉(思陵)과 광해군 묘 그리고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었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을 그리워하는 정순왕후의 애달픈 사연과 남양주 산비탈에 초라하게 자리잡은 광해군과 탄현의 장릉에 있는 인조 사이의 기막힌 인연까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나 나나'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자기와 맞는 논리는 받아들이고 맞지 않는 논리는 배척하며, 보고싶은 것만 보는 현상이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사릉에서는 영월 장릉에서 옮겨 심었다는 작은 소나무를 찾아보았다. 죽어서도 떨어져 그리움만 안고 있는 두 부부를 위하여 몇 년 전에 소나무를 서로 교환하여 심었다는 말을 영월에서 들었기 때문에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 마음 알아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사람들의 온정을 가득 담고 있어서인지 더욱 소중하고 애틋했다. 소나무 씨에는 날개가 있다던데 큰바람 타고 날아 서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로 약 10여분을 이동한 후 산 중턱에 내려서 쉬엄쉬엄 걷다보니 비탈진 곳에 광해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옹색하게 자리잡은 그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지금까지 무심하게 지내온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괜히 대선배에게 투정을 부렸다. "아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임진왜란 당시에 도망간 선조를 대신하여 전쟁터에 나가 싸웠고 전후 복구사업을 이루고 무엇보다 실리적인 외교를 통하여 조선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준 임금인데… 조선을 말아먹은 왕들도 버젓이 큰 왕릉에 거만하게 있는데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 역사이고 그것을 통하여 평가받는다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나간 역사가 잘못 되었다면 아무리 조선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후세인 우리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는 차마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지만 나는 그 선배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광해는 어머니가 보이는 곳에 부인과 같이 있잖아. 살아서 그리워했던 그 사람과 이곳에 함께 있으니 그나마 단종보다는 나을 것이야. 살아서 생이별한 것도 서러운 데 죽어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면 얼마나 한이 되겠는가?" 전쟁 때 피난내려와 아흔이 넘게 살아오면서 쌓여온 그리움이 가을 낙엽을 타고 더 깊숙이 내려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운 아버지도 살아계셨으면 이제 아흔이 넘으셨는데 한 번도 이런 동행을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가득하였다. 실향민 운동회에 같이 가자고 하실 때에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었던 내가 그리워할 자격이나 있는지… 통일되면 그리운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모시고 그곳에 터잡고 살려는 마음 하나로 용서를 빌 뿐이다.

그리움에는 편가르기가 없다. 보고싶은 마음 한이 없는 것을 괜한 심술로 푸는 먼 후배를 애잔한 마음으로 품어주는 선배가 참 고맙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젊으실 때 후배왔다고 다른 일 제쳐두고 술 한 잔 사주시던 멋쟁이 그 선배님들이 이제는 단풍이 되셨다. 늦가을 단풍이 봄의 꽃보다 더 붉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었지만 나는 지금의 이 분들이 그때보다 더 좋다. 손을 잡고 같이 걸어서 좋고 집까지 모셔다 드려서 좋고 무엇보다 귀에 대고 말씀드려도 돼서 좋다. 이제는 그리움까지도 같이해 주신다. 모든 그리움들이 아쉬움에 바래지 않고 설렘에 물들면 낙엽조차도 새로운 시작이겠지.

가을소풍 단체사진을 찍었다. 내년에도 모두 같이하기를 기원하면서….

"그대의 어디를 움켜쥐어 잠시 멈 추어 있게 할 수 있을까?" - 영화 '인간의 시간' 중에서

(칼럼위원 김두현 원장(김두현치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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