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참 별난 병도 많다. 치명적인 병은 암이다. 암도 가지가지인지라 다양하게 고통을 주고 있지만 특정 암을 제외하곤 대부분 현대의학으로 정복이 가능하다. 환자가 의사를 믿고 잘 따라주어야 치유가 가능한 것은 물론이다. 살다보면 여러 부류의 친구들이 있는데 내 경우 출석하는 성당의 동료들과 가깝게 어울린다. 모두 밝고 긍정적이라 모임에 나가는 것이 즐겁다.

그런데 한 친구가 윌슨병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게 되어 가슴이 아팠다. 윌슨병이란 병명(病名)은 처음 들었는데 몸에서 구리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치명적인 병이라는 것이다. 우리 몸에 구리는 꼭 필요하다. 보통사람의 경우 필요이상의 구리가 들어오면 배설되는데 윌슨병 환자는 구리배설이 불가하므로 몸에 쌓인다는 것이다. 남은 구리가 대부분 간에 쌓여 간이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들어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용케 극복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간이식 이외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뇌사환자의 간을 급히 알아보고 간이식을 받기로 한 날, 부랴부랴 병원으로 갔다. 이제 생명을 부지하겠구나 생각하던 차, 이식 불가능한 간으로 판명되어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었다. 친구에게 맞는 간을 구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고 기다릴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밤 늦은 시간이라 집으로 돌아간 뒤 다음 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아침에 눈뜨자 바로 확인한 문자가 비보(悲報)였다. 아침 6시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식하려던 간이 맞지 않아 '기다려야지!' 하며 웃었던 그의 모습이 생전의 마지막이었다. 참담했다. 삶과 죽음 사이엔 문턱이 없는지 시나브로 삶에서 죽음으로 이동하는 모양이다.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삶이 다하면 죽음으로 가는 것 또한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 또는 병으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헤어진다는 것은 가슴쓰린 일임에 분명하다. 어차피 갈 것 남보다 조금 먼저 갔다고 대범하게 생각하고 넘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은 수양이 부족해 참 어렵다.

먼저 간 친구는 나이 많은 부모님이 지금까지 보살펴왔다. 부모님께서 연로하심은 당연한 이치이다. 빈소를 찾아 연도를 드리고 그의 영정에 절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부모님께도 인사드렸다. 이웃에 사는 분이라 오가다 자주 만났지만 이리 만나게 되어 슬픔의 인사를 전했다. 부모님은 담대하셨다. 우리 요한피셔가 '지금까지 살아준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하신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도 편안하게 갈 수 있겠다며 만면에 웃음을 지으시는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슬퍼해주고 하루 종일 연도행렬이 끊이지 않고 하늘도 땅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친구는 오래 전부터 이 병으로 고생했다.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가끔 입원한다고 사라진 것이 간이식을 위한 입원이었고 굳이 결혼이야기를 하면 손사래를 쳤던 것도 자신의 지병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영정을 보며 해맑은 그의 웃음기에 나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 힘들었을 이 세상 소풍이 종교의 힘,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끈끈함으로 그나마 즐거움으로 승화되었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이제 조용히 그를 보내야 한다. 내 마음에 남아있던 찌꺼기도 깨끗하게 털어버리려 한다. 그는 참으로 행복했다. 자신을 잘 알며 남과 어울렸고 누구보다 하느님을 가까이 하며 남의 행복을 위해 늘 앞장섰다.

생전에 그를 귀찮게 했던 윌슨병이란 녀석이 다른 사람에게는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도록 극복가능한 좋은 약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는 분들이 계시는 그런 세상이 곧 오리라 생각된다. 이제 그의 명복을 빌며 좋은 곳에서 평안하게 살기 바란다. 그리고 그의 주검이 남아있는 모두에게 희망과 평화를 전하며 더 좋은 세상의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날들이 바람처럼 스쳐지나간다. 고통 속에서도 씨익 웃어주던 그의 미소가 내 가슴에 남는다.

(칼럼위원 최영한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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